춘천마라톤 80주년 전시 - Wish You Were Here
People2026.10.18 sun 10:00
첫번째.
황영조 - 남김없이 소진하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42.195킬로미터 안에 가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쏟아내며 달려왔다.

- Q. 선수에게 마라톤은 어떤 운동이었나요?
- 저는 사실 뛰는 게 좋아서 뛴 사람이 아니에요. 늘 뛰기 싫었고, 빨리 이 힘든 운동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마라톤이 제 꿈이었고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계속 뛰었어요. 저에게 마라톤은 즐긴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운동이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한다'고 하잖아요. 말 그대로 정신과 영혼까지 다 태워야 하는 일이었어요. 42.195km 안에서 가진 에너지를 전부 쓰고 나오는 것, 피니시 라인까지 얼마나 남김없이 소진하고 들어오느냐의 싸움이었습니다.
- Q.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어떤 승부를 생각했나요?
- 대회마다 달라요. 기록을 목표로 할 때가 있고, 우승을 두고 승부를 걸 때가 있죠. 바르셀로나는 막바지에 몬주익 언덕이 가파르게 있고 기온도 30도가 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록을 생각하고 뛰는 게 아니에요. 포디움 제일 꼭대기에 올라가느냐, 안 올라가느냐를 놓고 승부를 거는 거죠.
- Q. 그런데도 다시 풀코스를 뛰고 싶다고요.
- 죽기 전에 한 번은 다시 뛰고 싶어요. 저는 살면서 뛰기 좋아서 뛴 적이 없어요. 늘 뛰기 싫었지만 꿈과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뛰었습니다. 그때는 대한민국을 위해서 뛰었죠. 지금은 나를 위해서 뛰어야겠다는 거예요. 내가 뛰고 싶을 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한번 뛰어보려고요.
두번째.
안은태 - 초연함
러너이자 사진가. 좋아하는 일을 질리지 않고 꾸준히 하고자 노력한다. 풀코스 2시간 29분 15초의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유튜브와 러닝 크루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Q. 지금도 계속 달리는 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 처음에는 거창한 의미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 이유가 없어요. 밥을 먹거나 잠을 자는 것처럼 너무 일상적인 게 되어버렸고 그냥 오늘의 할당량을 채운다고 생각하고 달립니다. 아무런 루틴도 징크스도 없는 게 오히려 꾸준함의 비법인 것 같아요. 달리는 동안에는 걱정거리가 사라지고, 달리고 나면 개운함만 남습니다.
- Q. 2시간 29분대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도 기록에서 자유로울 수 있나요?
- 더 잘 달리면 좋죠. 하지만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기록에만 의미를 두던 사람들이 슬럼프가 왔을 때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제가 오래 달릴 수 있었던 건 오히려 계속 건조하게 달리고 있어서 인 것 같습니다. 예전보다 잘 달리면 좋고, 아니면 말고. 이제는 기록 앞에서도 조금 초연해질 수 있어요.
세번째.
김성우 - 서두르는 것에는 축복이 없다
마인드풀 러닝 스쿨의 코치. 속도와 기록을 좇아 케냐까지 떠났던 시간을 지나, 지금은 자신에게 맞는 속도로 달린다.

- Q. 이 DNF 코인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나요?
- 브루클린에서 열린 100km 대회에 나갔을 때 받은 DNF(Did Not Finish) 코인이에요. 아침에 대회를 위해 차를 몰고 가는데 고속도로 1차선에 차 한대가 덩그러니 서있었어요. 시속 100킬로미터 가까이에서 핸들을 급격하게 꺾었어요. 심장이 떨어졌다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고, 그 충격 때문인지 대회장 첫 바퀴를 돌때부터 컨디션이 안 좋더라고요. 100킬로미터를 마칠 수야 있겠지만 완주하고 돌아가는 길이 두려워질 것 같아 50킬로미터에서 멈추기로 했습니다. 완주자에게 주는 메달 대신, 중간에 그만둔 사람에게 주는 나무 코인을 받았죠. 처음에는 솔직히 약이 오르기도 했어요. 그런데 돌아볼수록 소중해졌습니다. 포기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했고, 그 용기를 낼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다음에 다시 시도해볼 도전이 남았다는 것. 제게는 첫 DNF였으니까요.
- Q. 스물다섯에 케냐까지 달리러 간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 잘 달리는 사람들에게는 무슨 비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일종의 치트키를 찾으러 간 거죠. 그런데 2주 만에 알았습니다. 비밀이 아니라 삶에 있다는 걸요. 그들은 어릴 때부터 학교까지 걷고 뛰고, 하루 종일 몸을 움직이며 살아왔어요. 그때 제가 얼마나 조급했는지 알게 됐습니다. 달리기에는 왕도가 없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자주, 무리하지 않고 달리는 것뿐입니다.
- Q. 지금의 달리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 계속 덜어내려고 합니다. 속도나 거리를 신경 쓰기보다 코로 숨 쉬는 것이 편한 정도로 달려요. '이렇게 달려야 한다', '이 시계가 필요하다' 등 '달리기는 이래야 한다'는 기준들에서 벗어나려고 하고요. 달리기의 가치를 기록만으로 판단하고 싶지 않아요. 달리고 난 뒤 나를 조금 더 좋아하게 됐다면, 그것도 충분히 좋은 달리기라고 생각합니다.
네번째.
구은성 - 시야 바깥의 이야기
프로-스펙스 사업부장. 어린 시절부터 러닝과 사이클링을 즐기며 스포츠를 통해 자신과 주변을 알아가는 시간을 이어오고 있다.

- Q. 결과보다 그 과정에 더 마음이 가는 이유가 있나요?
- 저는 스포츠를 결과만으로 평가하고 싶지 않아요. 이겼든 이기지 않았든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 들인 노력과, 그 지점까지 가려는 열정을 보고 싶어요. 투르 드 프랑스도 얼핏 개인 스포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팀 스포츠예요. 한 명의 에이스를 위해 '도메스티크'들은 앞에서 바람을 막고, 페이스를 끌어주며 자신의 역할을 다합니다. 대부분은 옐로 저지를 입은 우승자를 기억하지만, 한 사람의 결과를 만들기 위해 시야 바깥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면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어요. 저는 그런 과정에 더 순수하고 숭고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Q. 스포츠를 하며 배운 것이 있다면요?
- 어릴 때 산악자전거를 타다가 험한 길 앞에서 겁을 먹은 적이 있어요. 그때 옆에 있던 분이 "자전거를 믿어라. 이런 환경을 견디도록 만들어진 기계다"라고 하셨어요. 자전거가 나를 받쳐줄 거라는 신뢰가 생기니 용기도 생기더라고요. 결국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는 그런 신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로-스펙스도 그런 신뢰를 줄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Q.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러닝화가 있나요?
- 저한테는 안정화예요. 풀코스를 준비할 때는 대회 그 하루의 고통보다 그 하루를 준비하는 시간이 더 길고 힘들어요. 매일, 매주, 매월 훈련량을 채우다 보면 어느 순간 몸에 무리가 오는데, 저는 왼쪽 발목 안쪽에서 자주 신호가 왔어요. 목표한 거리를 채우려고 조금 더 밀어붙였다가 일주일 내내 못 달린 적도 있고요. 그런 일을 몇 번 겪고 나서는 한 시간 이상 달리고 싶은 날엔 무조건 안정화를 골라 신어요. 불안정한 제 발목을 잡아주니까요, 저한테는 보험 같은 신발이에요. 온갖 화려한 러닝화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신발입니다.
다섯번째.
권은주 - 앞바람
전 국가대표 마라토너. 1997년 춘천마라톤에서 2시간 26분 12초의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선수 은퇴 후에는 러닝 크루를 이끌며 달리기를 통한 삶을 회복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 Q. 선수 시절의 훈련 일지를 아직 간직하고 계신가요?
- 선수 때는 일지를 쓰면서 멘탈을 관리했어요. 아파도 훈련을 나가야 했고, 그 시간이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거든요. 그래서 일지에 '아프면 안 돼', '즐길 줄 알아야 돼, 즐기자' 같은 말을 많이 적었습니다. '괜찮아, 조금 쉬어가도 괜찮아'라고 저 자신을 위로하기도 했고요. 나중에 선배가 일지를 보고 "너 아프면 안 된다는 말을 정말 많이 썼더라"고 하더라고요.
- Q. 신기록을 세운 1997년 춘천마라톤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 스물한 살, 첫 풀코스였습니다. 조금 흐리고 바람이 꽤 불었어요. 풍속은 기록과 밀접해요. 오랜 시간 맞바람을 맞으며 달린다는 건 그만큼 체력을 더 써야 한다는 뜻이죠. 사람이 많으면 그 틈에 숨어서 저항이라도 덜 받고 가는데 그날은 거의 혼자였어요. 15km 이후부터는 거의 혼자 달렸어요. 당시에는 그저 힘들게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레이스가 끝나고 외국 대회를 많이 다니고 선수들을 많이 겪어본 에이전시 분들이 그러더라고요. "이 코스와 날씨에서 2시간 26분 12초를 뛴 건 대단한 기록이다. 바람과 날씨만 받쳐줬다면 더 좋은 기록도 가능했을 거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그날의 바람을 힘들었던 기억보다, 그 말을 나누었던 순간으로 기억해요.
- Q. 지금은 달리기를 다르게 바라보나요?
- 선수 때는 기록과 경쟁 안에만 있었습니다. 은퇴 후 만난 러너들은 달리는 자체를 행복해하는 러너들이 더 많아요. 저마다 힘든 시간을 지나면서도,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와 달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조금씩 되찾더라고요. 저도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서도 즐겁게 달리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예요. 함께 달리는 분들도 조금 더 즐겁게, 자기 몸을 아끼면서 이 좋은 행복감을 오래오래 느꼈으면 좋겠어요.
여섯번째.
심진석 - 고요히, 행복하게
스무 살에 건설 현장에서 비계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안전화를 신고 출퇴근길을 달리는 모습이 알려지며 '낭만러너'가 되었다. 지금은 전국마라톤협회 소속 선수지만 여전히 일주일에 이틀은 안전화를 신고 달린다.

- Q. 이 안전화를 신고 달리기 시작한 이유가 있었나요?
- 건설 현장에서 일할 때 따로 훈련할 시간을 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벽 출근길에 안전화를 신고 물통이 든 가방을 멘 채 8킬로미터 정도를 뛰었어요. 찬 공기를 맞으며 아무도 없는 조용한 길을 달리는 것 자체가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러다 2015년 처음 출전한 동네 5킬로미터 대회에서 우승했고, 그때 처음 '내가 달리기에 맞는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 저의 취미이자 장점을 찾은거죠.
- Q. 달리면서 목표도 계속 달라졌나요?
- 첫 대회를 시작으로 10km, 하프, 풀코스로 거리를 늘렸어요. 첫 풀코스는 3시간 12분이었고, 지금은 2시간 31분 15초까지 줄었습니다. 온전히 제 노력으로 기록을 줄일 수 있다는 게 즐거웠어요. 달리기는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따라 달라지고 만들어지는 것이니까요. 이제는 해외 마라톤에도 도전해보고 싶어요. 40살, 50살 뒤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100살까지 달리는 게 목표예요. 그때는 기록보다 건강과 완주만 생각하면서 달릴 겁니다.
일곱번째.
이영표 - 충만한 결핍
전 국가대표 축구 선수. 한계를 넘나들며 달려야 했고, 그래서 달리기가 즐겁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은퇴하고 언노운 크루와 함께 달리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져도 웃을 수 있게 되었다.

- Q. 평소와 다른 환경에서 달리는 걸 좋아한다고요?
- 비가 오거나 폭우가 쏟아지는 날 달리는 것을 좋아해요. 눈이 펑펑 내리는 날도 좋고요. 인생의 대부분을 철저한 루틴 속에서 지내온 탓인지, 그런 특별한 환경을 만나면 왠지 설레는 기분이 들어요. 하늘이 내게 준 자그마한 변칙 같은 선물이랄까요. 발이 미끄러지지 않을 만큼만 밀고 나가다 보면 속도를 제가 정하는 게 아니라 그날이 정해준다는 생각도 들어요. 빨리 가려고 해도 갈 수 없으니까요. 자연스럽게 그 풍경 속에서 조용히 달리게 되고, 그 순간에는 정말 자유롭다고 느껴요.
- Q. 고통스러운 달리기에서 오히려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있나요?
- 처음 크루와 함께 뛰었을 때가 기억나요. 각자가 홀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통째로 어딘가로 이동하는 기분이었어요. 마치 공간이 우리를 태우고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느낌. 러닝은 종종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함께 달릴 때면 혼자서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순간에는 고통이 사라지는 행복을 느껴요. 저는 그 감각을 느끼기 위해 달리는 것 같아요.
- Q. 앞으로 해보고 싶은 달리기가 있나요?
- 한 번쯤은 페이스메이커로 마라톤을 달려보고 싶어요. 물 가지러 갈 힘도 없이 너덜거리며 달릴 때, 누군가 앞에서 이끌어준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인지 경험했거든요. 그래서 저도 어느 한 사람의 페이스메이커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혼자 잘 달리는 것보다, 같이 끝까지 가게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 마라톤을 그만두기 전에 제가 달리면서 받은 도움을 다음 사람에게 돌려주고 싶습니다.
여덟번째.
박희숙 - 기록 없는 달리기
춘천마라톤 공식 페이스메이커이자 27년차 러너. 풀코스를 200회 완주했지만 페이스메이커로 달린 시간은 자신의 기록이 아니라고 말한다. 일상에서는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 Q. 이 기록표는 달릴 때 어떻게 사용하나요?
- 페이스메이커는 고독한 레이스를 함께 달리는 동반자이자, 도로 위의 시계 같은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목표한 시간대에 맞춰 전반과 후반의 페이스를 고르게 운영하고, 기복 없이 이끌어 가야 하죠. 이 기록표에는 5km마다 몇 분 몇 초에 도착해야 하는지가 적혀 있어요. 통과 지점마다 허용되는 오차는 5초 안팎입니다. 컨디션이 좋다고 앞서 나가도, 힘들다고 늦춰서도 안 돼요. 수많은 주자의 레이스가 페이스메이커의 정확한 속도 유지에 달려 있기 때문에 항상 큰 책임감을 안고 달립니다.
- Q. 그렇게 완주한 기록도 자신의 기록 아닌가요?
- 제 개인 최고 기록은 2시간 59분 05초예요. 하지만 페이스메이커로 달리는 날에는 기록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습니다. 완주기록증도 나오고 메달도 받지만, 그날의 시간은 제 것이 아니에요. 뒤에서 따라온 사람들의 것이죠. 레이스를 잘 끌고 갔다면 그건 그분들이 잘 달린 것이고, 제가 페이스를 놓쳤다면 그건 온전히 제 책임이 됩니다. 가끔 그동안 모아온 완주기록증과 메달을 들여다봐요. 1999년 춘천마라톤을 시작으로 27년째 달려온 시간을 이 종이 한 장과 메달이 대신 기록해주고 있구나 싶어요. 참 고생했다, 그 긴 여정을 쉼 없이 달려왔구나. 그렇게 스스로 토닥여주고 싶어집니다.
아홉번째.
이성호 - 현재진행형
안경을 수입하고 판매하는 일을 한다. 2001년 춘천마라톤에서 생애 첫 풀코스를 완주했다. 57세가 된 올해, 열 번째로 같은 출발선에 선다. 완주와 함께 춘천마라톤 명예의 전당에 오를 예정이다.

- Q. 이 메달들을 계속 간직하는 이유가 있나요?
- 2001년에 받은 첫 완주 메달부터 하나씩 모아왔습니다. 지금은 거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어요. 가장 최근에는 아내가 첫 풀코스를 뛰고 받아온 메달도 더해졌고요. 하나하나를 보면 바쁜 일상 속에서도 시간을 내고 노력했던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메달 자체보다 그렇게 쌓인 시간이 저에게는 큰 긍정의 에너지예요.
- Q. 그중에서도 춘천마라톤이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춘천마라톤 코스가 국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고저차가 적당한 언덕이 있고, 의암호를 끼고 돌다가 골인 지점까지 도로가 탁 트여있거든요. 생애 첫 풀코스를 완주한 곳이어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저를 다시 그곳으로 이끕니다. 풀코스는 35킬로미터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특히 소양교를 지날 때면 늘 눈물이 났습니다. 지금도 그 장면은 잊히지 않아요. 예순이 되고 일흔이 되고 여든이 되어도 아마 그곳을 달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마지막으로 뛰게 될 마라톤도 춘천이었으면 해요.
열번째.
이재위 - 문 밖의 세계
매거진 GQ의 디지털 디렉터. 걷고 달리고 파도를 타며 자연과 교감하는 일을 삶의 중요한 방식으로 삼고 있다.

- Q. 이 수건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나요?
- 2024년 10월 안식월을 받아 한 달 동안 발리로 서핑을 하러 갔어요. 11월에 있을 JTBC 마라톤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주변에 마땅히 달릴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당에 수건 한 장을 깔고 맨발로 매일 한 시간씩 제자리 달리기를 했어요. 어떻게든 심박을 올리고 발목의 탄성을 유지하려고요. 한국으로 돌아와 그해 마라톤에서 처음으로 서브3를 했습니다. 수건 한 장에서 시작한 달리기가 저를 서브3까지 이끈 셈이죠.
- Q. 달리기 전, 반복하는 의식이 있나요?
- 달리러 나가기 전에는 현관 앞 아일랜드 테이블에 핸드폰을 내려둡니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자유로워지는 기분이 들어요. 때로는 길을 잘 모르는 산을 달릴 때도 핸드폰을 가져가지 않습니다. 산속에 고립되어 있다는 감각이 들수록 오히려 더 자유로워져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잠시라도 혼자이고 싶을 때면 핸드폰을 내려놓고 산으로 뛰어갑니다.
- Q. 달리기를 하며 자신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나요?
- 아직 더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요. 마흔이 넘었어도, 주변에 코치나 선생님이 없어도, 그저 평범한 회사원이어도요. 막연히 무언가가 되고 싶었던 어린 시절처럼 저에게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 즐겁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달리기는 저 자신에게 달려 나가는 일이에요. 결승선 너머에 조금 더 성숙하고 신체적으로도 발전한 내가 기다리고 있다고 믿으면서요.
열한번째.
뻔더멘탈 - 작은 변화들
운동 크리에이터. 일상에서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움직임을 소개하고 있다. 맨몸운동을 중심으로 즐겁고 꾸준히, 오래 움직일 수 있는 달리기를 추구한다.

- Q. 감자와 초승달 인형에는 어떤 기억이 담겨 있나요?
- FRC라는 모임을 만들어 사람들과 아침 일찍 몸을 풀고 달렸어요. 서울에서 모였던 어느 날에는 달리는 대신 다 같이 산에 올랐는데, 한 분이 저희를 생각하며 직접 만든 인형을 선물해주셨어요. 각자의 특징을 담아 명재는 감자, 태호는 초승달 모양이었죠. 그 인형을 보면 산에 올랐던 기억보다 그날 나눴던 이야기들이 먼저 떠올라요. 함께 움직이며 만난 사람들과 나눈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입니다.
- Q. 그날의 이야기가 특히 기억에 남는 이유가 있나요?
- 저희에게 몸을 움직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운동을 시작하는 것 자체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더라고요. 몸이 뻣뻣해서 운동을 못 한다고 생각했던 분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몇 달 뒤에는 산에 가거나 러닝까지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작고 익숙한 하나의 움직임이 누군가에게는 꽤 큰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럴 때 느껴요.
- Q. 두 분이 맨몸운동에 빠지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 각자 UDT와 해양경찰에서 근무하면서 몸을 운동을 위한 대상이 아니라, 무언가를 해내기 위한 도구로 쓰게 됐어요. 달리고, 버티고, 수영하고, 기어가고, 무거운 것을 들고 이동했죠. 그런데 그렇게 극한의 환경에서 반복했던 것도 결국 걷고, 뛰고, 기어가고, 밀고, 당기고, 매달리는 아주 기본적인 움직임이더라고요. 그래서 맨몸운동에 빠진 것 같아요. 저희가 하는 일도 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던 움직임 중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는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열두번째.
오인찬 - 땅바닥
패션 편집숍 8DIVISION의 공동 대표. 남산 아래 사무실에서 일하다 생각을 비워내고 싶을 때면 둘레길로 나가 달린다.

- Q. 오래된 러닝웨어를 아직 가지고 있다고요.
- 처음 참여했던 러닝 행사에서 입은 옷이에요. 그전까지 달리기를 해본 적은 없었지만 축구를 꾸준히 했으니 잘 뛸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5킬로미터 중 3킬로미터도 채 뛰지 못하고 포기했습니다. 같은 업계 사람들과 모델 친구들도 많아서 꽤 부끄러웠어요. 옷이 워낙 많아 주기적으로 정리하는데도 이것만큼은 남겨둡니다. 그날의 수치심을 기억해뒀다가 다시 한번 저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으로 삼으려고요.
- Q. 지금은 왜 달리나요?
- 가장 큰 목적은 잡생각을 떨치는 거예요. 일하다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면 할일이 남아 있어도 그냥 나가서 뜁니다. 음악도 거의 듣지 않고 땅바닥만 보면서요. 처음에는 사실 아무 생각이 안 들어요. 그러다 3킬로미터, 4킬로미터쯤 지나면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정리되기 시작해요. 달리기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일이 없었을 것 같아요.